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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달반 동안 북미 서부 등반지들을 다녀왔다.
이렇게 긴 여행은 처음이어서 시행착오도 많았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것들을 배웠다.
희미해지는 기억이 아쉬워 여기에 간략한 기록을 남긴다.
Squamish, BC
첫 여행지는 캐나다 대표 등반지이자 여름등반지이기도 한 Squamish 이다.
처음 도착한 날부터 비가 내린다. 아직 6월 중순이라 시즌보다 이른 탓이려니 한다.
Stawamus Chief 야영장은 원시림 가운데 있는 듯 울창한 숲을 자랑한다.
멋진 등반선들도 많은데 자주 비가 오니 마음이 조급해진다.
사흘중 이틀은 비가 왔는데 올해 비가 유난히 잦았던 건지 잘 모르겠다.
어느 정도의 비는 감수하고 젖은 크랙도 등반하며 이틀 등반 하루 휴식의 페이스를 이어갔는데 이게 무리였는지
도착 일주일만에 걸린 감기는 2주간 떨어지지 않고, 감기가 떨어질 즈음엔 무릎 인대를 심하게 다치고 말았다.
걷기도 어려운 상황이 되어 요양모드로 전환. 이후 일정을 변경해야 했다.
Kananaskis / Canmore, Alberta
Squamish 의 긴 비가 그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Alberta 로 이동하며 road trip 을 즐겨보기로 한다.
Alberta 에서는 무시무시한 우박을 만나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하고 밤새 내리는 세찬 장대비에 잠 못 이루기도 했다.
내륙지역 여름의 극적인 날씨를 경험하며 자연의 힘에 새삼 경외심을 품게 된다.
이렇게 놀러 다니며 꼬박 한달간 등반을 접었다.
같이 나온 은주는 내 탓에 쉬게 되어 미안하고, 그럼에도 힘든 내색않고 용기를 북돋아 줘서 고맙다.
가려던 부가부 일정은 취소되었고 캘거리 가는 길에 이틀간 재활등반 정도만으로 캐나다의 일정을 마무리 했다.
Lower Kananaskis Lake
South Lake Tahoe
미국에 와서 좀 더 재활하기 위해 어프로치 짧고 쉬운 Lake Tahoe 인근을 찾았다.
원래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어서 구경할 것도 많고 등반지도 아기자기한 것이 좋다.
Tuolumne / High Sierra
Tuolumne 야영장에 도착해 석문형, 명희누나, 강레아선배 등과 조우했다.
반가운 이들과의 긴 대화에 좋은 맥주까지 곁들이며 반짝이는 밤하늘을 만끽한다.
떠나며 남겨주신 부식 덕분에 은주와 나의 식생활은 양식 일변도에서 한식 일변도로 급선회했다.
Tuolumne meadow 를 가로지르는 강과 Tenaya Lake 의 풍경은 아름답고 평화롭다.
도로 주위로 Fairview Dome, Daff Dome, Stately Pleasure Dome 등등 아름다운 돔들이 도열해 있고
좀 더 걸어 들어가면 Cathedral Peak, Third Pillar of Dana, Mt Conness 등이 멋진 등반선을 품고 있다.
오랜만에 등반의 즐거움을 다시 느껴볼 수 있었다.
Incredible Hulk, Sawtooth Range, High Sierra
헐크는 이번 여행의 주요 목적지 중 하나인데 다친 무릎때문에 마지막까지 망설이다 가게 되었다.
오랜만에 풀배낭을 지고 반나절 걸어들어 가니 멋진 벽이 나타난다.
나는 내내 아이처럼 좋아하며 어쩔줄 몰라했다.
둘째날 Red Dihedral 전피치 온사이트 하며 헐크 정상에 은주와 함께 올랐다.
밤에는 하늘을 가로지르는 선명한 은하수를 헐크와 함께 사진에 담았다.
욕심같아서는 Positive Vibrations 까지 하고 싶었지만 체력부족으로 하단피치들 Cragging 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하산.
다음에는 잘 준비해서 더 많은 등반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Yosemite Valley
클라이밍의 성지라 불리는 요세미티 밸리에 도착.
예약해 둔 North Pines Campground 는 널찍하고 조용한 편이며 Camp4 는 상대적으로 소란스럽고 비좁은 느낌.
Serenity Crack/ Sons of Yesterday 는 크랙이 9피치에 걸쳐 이어지는 아름다운 선이었다.
El Capitan East Buttress 는 엘캡 맛뵈기로 다녀오기 좋았고
Nose 나 Salathe 는 하루 종일 줄서서 등반할 만큼 인기가 많아 하단 10피치만 등반해 볼까 하던 생각조차 접어야 했다.
Arch Rock 에서는 요세미티 첫 5.11 이라는 New Dimensions 에서 겸손을 배웠고
가보고 싶었던 Rostrum 에서는 8팀이 붙어 아름다운 등반선을 충분히 즐길 겨를이 없어 아쉬웠다.
요세미티 밸리에서 자유롭게 등반하려면 다양한 형태의 등반을 모두 소화할 수 있어야 하고
하루에 15피치 이상 갈 체력이 있어야 하겠다.
엘캐피탄과 같은 빅월을 효율적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캠훅 등을 사용한 신속한 인공등반 능력이 필요하고
후등자의 경우 능숙한 주마링이 유용하겠다.
그리고 Nose 와 Salathe 의 경우 무엇보다 다른 팀과 덜 겹치는 타이밍을 잡는 것이 중요하겠다.
Needles, Sequoia National Forest
Sequoia 국립공원 남쪽에 위치한 Needles 는 무척 아름다운 등반지였다.
단지, 우리가 도착한 10월 초순은 이미 새벽에 물이 얼어붙는 계절이었다.
Dome Rock 에서만 하루 등반하고 Needles 는 정찰만 다녀오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며 다음을 기약한다.
Tahquitz / Suicide Rocks
미국 암벽등반이 태동한 곳이라 할 수 있는 Tahquitz 는 한국의 인수봉을 닮아있다.
그래서 무척 정겨운 느낌이었고 마음껏 등반해 볼 수 있었다.
10월 초순에서 중순까지도 햇볕이 드는 곳은 따뜻해 즐겁게 등반할 수 있었다.
Joshua Tree
사막 한가운데 조슈아 트리들이 서 있는 모습은 아마도 바오밥 나무들 다음 정도로 이국적인 느낌이 아닐까.
그런 가운데 화강암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어 등반가들을 불러모은다.
아름다운 크랙 선과 살벌한 페이스가 곳곳에 있고 제법 큰 바위도 그냥 볼더링으로 올라가면 내려오기가 되려 난감한 곳.
이곳은 이제 시즌이 막 시작되는 계절. 떠나오기 무척 아쉬웠다.
넉달의 시간동안 내내 온사이트 등반만을 하며 어느 루트도 두 번 시도하지 않았다.
워낙 많은 등반을 해보고 싶은 욕심에 그렇게 되긴 했지만 계속 이어지는 온사이트의 긴장감이 피곤하기도 하다.
가끔은 마스터 등반을 하며 기술적인 습득을 꾀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리라 생각한다.
이렇게 제법 긴 여행을 마쳤다.
등반에 있어 짧은 볼더링과 긴 알파인 루트가 다른 것처럼 여행도 단기와 장기여행의 방식이 달라진다.
짧은 볼더링이 집중력과 최대 근력을 요구한다면 긴 알파인 루트는 효율적인 등반과 체력이 필요하듯
장기여행의 많은 요소들은 잠시 꾹 참고 넘어가거나 회피할 수 없는 면이 있다.
등반, 여행, 인간관계 등 무엇이든 길게 지속하기 위해선 임시방편이 통하지 않고 본질에 다가설 수 있어야겠다.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며 배운 좋은 여행이었고, 한결같이 곁에 있어준 은주에게 무척 고맙다.
돌아와서 익숙함이 주는 안도감이 좋기도 하지만 가슴 한 켠에선 또 어떤 길들이 우리 앞을 찾아올지 벌써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