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5.01-03 용두산-향로봉
2014.05.01
여러날 먼 곳으로 떠날 꿈에 부풀어 한참 지도를 살핀다.
지리산 태극종주 코스를 떠올리다 한가할 때를 기약하고 더 북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당첨된 곳은 제천 용두산에서 횡성 매화산까지 이어지는 긴 능선.
연휴 첫날, 제천가는 열차를 타고 가다 달콤한 잠에 빠진 나머지 단양역에서 하차.
여느때 같으면 일정이 한참 늦어져 짜증이 솟구쳤을텐데 마음이 마냥 느긋하다.
도시에서 늘 쫓기듯 살다 혼자만의 여행을 나오니 느리게 사는 법을 자연스레 익히게 되는듯.
버스타고 세명대 앞에 내리니 멋진 소나무들이 반겨준다.
긴 여정의 시작을 기분좋게 시작할 수 있어 마음이 가볍다.
용두산을 올라 능선을 이어가며 보이는 멋진 고목나무들이 오랜 벗과 같이 반갑다.
중간에 길을 잘못 든데다 급사면에서 넘어지며 물통을 100미터 가량 아래 낙엽속으로 떨어뜨렸지만
운좋게 물통을 찾을 수 있어 가슴을 쓸어내렸다.
감악산 아래의 백련사에 들러 감로수를 떠왔다.
백련사는 조용하고 아담한 것이 산중 사찰의 정취를 오랜만에 느낄 수 있어 좋았다.
그 흔한 대웅전 현판 하나 달지 않은 심심한 모습이 오히려 내 마음속의 사찰의 모습에 닮아 있었다.
감악산 정상에 올라 이곳에서 비박하기로 결정.
석양에 황금빛으로 물든 산줄기를 한참 바라보다 잠자리를 청한다.
누워있다 눈 떠보면 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총총한 아름다운 밤.
곤하게 자다 6시에 일어나 보니 벌써 해가 저만큼 높이 솟아있다.
고요한 아침의 아름다운 풍경을 가슴에 담고 다시 길을 떠난다.
2014.05.02
감악산 능선따라 황둔으로 내려서는 길은 전망이 아름다워 연신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창촌마을 입구에서 국밥 한그릇 먹으니 든든하다.
매봉산 오름길을 능선따라 가려다 따가운 햇볕을 피할 요량으로 계곡길을 택했는데
계곡 상단에서 길이 뚜렷하지 않아 길없는 사면을 오르느라 땀 깨나 흘렸다.
응봉산부터는 이정표도 정상표식도 없다.
엉성한 지도 한장에 나침반과 이따금 바람에 나부끼는 리본을 따라 본능에 충실한 발걸음을 옮긴다.
전불골 갈림길 지난 곳에서 취나물 뜯으러 나오신 동네분들을 만나 주먹밥을 얻어먹었다.
힘든 발걸음 중에 보살을 만난 기분이다.
남대봉으로 향하는 능선은 길고도 길었다.
선바위봉에 이르러서부터 계속 서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오르락 내리락하며 힘을 뺀다.
내내 불던 바람은 해질 무렵엔 결국 비구름을 불러오고 사위는 안개에 묻혀 길찾기가 까다로와진다.
그래도 식수를 구하려면 상원사로 가야한다는 생각에 무거운 발걸음을 부지런히 옮긴다.
안개에 묻힌 암흑속의 희미한 줄기를 본능적으로 걸으며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낼 즈음.
산죽밭 끝에 남대봉 헬기장이 나타난다. 19:40
한숨 돌리고 상원사로 내려가 감로수를 떠와 헬기장 비박.
전날과 대조적으로 별 하나 볼 수 없는 안개 자욱한 하늘에 윙윙거리는 바람소리가 세찬 산중의 밤.
살아있음이 느껴진다.
2014.05.03
신발과 양말이 흠뻑 젖어있어 휴지를 넣어 침낭속에 두고 잤지만 말리기엔 역부족.
역시 양말은 하나 더 챙겼어야 했다.
아침에 경황이 없었는지 10분쯤 내려서다 이상해서 나침반을 보니 동쪽을 향하고 있다.
되돌아가 향로봉으로 가는 길을 걷지만 구름이 온통 뒤덮고 있어 보이는 경관은 없다.
대신 길가의 봄꽃들이 이슬을 한껏 머금고 나그네의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향로봉에 이르러 햇살이 비추니 젖은 몸과 마음을 햇볕에 맡겨본다.
발도 뽀송뽀송해지긴 했지만 젖은 양말을 신었더니 발에 물집이 잡힌다.
매화산까지 가기엔 먹을 것도 부족하고 몸도 지쳐있어 하산을 결정.
고든치에서 부곡쪽의 샘터를 확인해보려 내려갔는데 빽빽한 전나무숲이 멋지다.
500미터 내려간 지점에서 계곡소리가 들려 가봤더니 아름다운 계곡이 모습을 드러낸다.
관음사 하산길에는 따사로운 햇살을 만끽하다 탁족도 즐기고.
서울로 향하는 귀경길은 놀랍도록 착착 진행되었다.
하산후 집에 들어가는데 걸린 시간이 2시간 정도였으니 별들이 한줄로 늘어선 날이었나보다.
산의 아름다운 모습과 준엄한 모습, 그리고 너그러운 모습까지 모두 볼 수 있었던 다채로운 산행이었다.
그것이 같은 산을 대하는 나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돌아오자 마자 또다른 산행을 떠날 꿈을 꾸고 있다. 나는.